[책 리뷰] 노인과 바다
사멸하지 않기 위해 사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나는 몇 년 전부터 꽤 자주 내가 아주 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노인은 바깥에서부터 시들어가고 있었다. 사자 꿈과 바다를 닮은 두 눈을 제외하면 그와 그를 둘러싼 것들은 이미 시들어 있었고, 계속 시들어가고 있었다.
"Everything about him was old except his eyes and they were the same color as the sea and were cheerful and undefeated."
녹슬어가는 육신은 마음을 우울의 늪에 빠뜨린다. 노인을 3일 밤낮으로 끌고 다녔던 청새치, 거친 바다에서 노인의 물고기를 모조리 앗아간 상어들, 그리고 노인. 그들은 모두 요동치는 생명들이다. 거대한 청새치와 상어들이 발산하는 생명력이 아직 노인에게도 남아있다. 아니라면 어떻게 노인이 청새치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겠는가? 아니라면 어떻게 노인의 눈이 생명의 바다를 닮아 있겠는가?
"But I try not to borrow. First you borrow. Then you beg."
늙은 어부 Santiago는 찢어지게 가난하다. 누군가가 노인을 묘사할 때 impervirished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 단어는 very poor라는 의미도 있지만 '약한', '힘을 잃은'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 단어가 노인을 묘사하는 적확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내 삶도 늘 가난했다. 가난은 낭만적이지 않다. 고결하지도 않다. 가난은 그저 삶을 고단하고 척박하게 만들 뿐이다.
"Although it is unjust, he thought. But I will show him what a man can do and what a man endures."
노인은 낚시를 unjust 하다고 말했다. 자연에서 정의로운 일이 과연 있을까? 인간 세계에서 정의라고 부르는 가치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롭지 않아야 생존에 유리한 자연 속에서는 노인이 아무 죄 없는 청새치를 죽이고, 상어들이 노인이 어렵게 낚은 청새치를 약탈한다. 그 냉혹한 자연 속에서 한 인간 존재, 그것도 시들고 노쇠한 어부가 결연하게 말한다. 인간이 무엇을 해낼 수 있고 무엇을 견뎌낼 수 있는지 보여주리라고.
"You are killing me, fish, the old man thought. But you have right to. Never have I seen a greater, or more beautiful, or a calmer or more noble thing than you, brother. Come on and kill me. I do not care who kills who. Now you are getting confused in the head, he thought. You must keep your head clear. Keep your head clear and know how to suffer like a man. Or a fish, he thought."
노인은 청새치를 사랑했다. 위대하고, 아름답고, 차분하고, 고결한 그의 형제를. 자신이 죽여야만 했던 청새치에게 경의를 느낀 까닭은 대자연 속에서 그들은 말 그대로 형제이기 때문이다.
"He hit it without hope but with resolution and complete malignacy."
'without hope'는 결국엔 상어들에게 패배하리란 걸 그도 잘 알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패배할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고, 계속 싸워야 할 때 그가 취한 태도는 resolution과 complete malignacy이다. 결의와 완전한 악의. 그의 악의는 상어의 악의와 다르지 않다. 상어의 악의는 비난받을 성질의 악의가 아니다. 노인의 악의 또한 마찬가지다. 83일 연속으로 물고기를 잡지 못한 노쇠하고 가난한 어부가 3일 밤낮의 사투 끝에 잡은 대형 물고기를 상어로부터 지키려는 그 절박함이 complete malignacy의 근원이다. 노인의 악의는 삶과 이 세계로부터 느끼는 나의 절망을 달래준다.
"You killed him for pride and because you are a fisherman. you loved him when he was alive and you loved him after. If you love him, it is not a sin to kill him. Or is it more?"
피를 나눈 형제를 살해하고 생명을 준 어머니와 맞서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노인에게 물고기는 죽여서 취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닷속의 자연을 노인의 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물고기를 돈벌이 수단으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소설 곳곳에서 자연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찾아볼 수 있다. 노인은 물고기를 단순히 사냥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물고기를 그의 훌륭한 적수로 여겼다. 젊었을 때 팔씨름을 겨뤘던 어떤 사내처럼.
"You're tired, old man, " he said. "You're tired inside."
나는 이 문장을 읽었을 때, "I'm tired. I'm tired inside."라고 읊조렸다. 나의 20대와 30대 초반을 노인이 걸프만 바다에서 물고기와 사투했던 3일에 투사했다. 그 모든 패배의 나날들 속에서 나는 희망 없음을 묵묵히 견뎌내야만 했다. 삶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상어들이 내가 가진 것들을 끝끝내 전부 약탈해갈 것을 알면서도 내가 가진 모든 무기가 다 부서질 때까지 상어 대가리를 향해 내가 가진 것을 마지막 하나까지 휘둘러야만 했다. 그 끝에 영광이라도 남았을까? 자긍심은? 사람들은 청새치와 상어도 구분 못했다. 그 싸움의 현장에 없었던 외부인들은 무지했다.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탈진해 버릴 것만 같은 내 존재 말고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과 싸웠는지조차 오해하고 나의 역사에 관심 없을 거란 걸 안다. 걸프만의 바다에서 3일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사람들은 영영 모를 것처럼.
"It was too good to last, he thought. I wish it had been a dream now and that I had never hooked the fish and was alone in bed on the newspapers."
실패와 상실을 경험해 본 이라면 노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온 힘을 다해 끝까지 분투했는데도 불구하고 무력하게 무언가를 잃어봤다면.
(몇 년이 지나 이 부분을 다시 읽어봤다. 이상한 우연인데, 오늘 나는 큰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다. 몇 년 전에 이 글을 썼을 당시의 나는 오직 노인의 상실과 허무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 나아가 노인의 내일이 궁금해졌다. 노인의 어제와 오늘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다시 바다에 나갔을까? 그토록 큰 패배를 경험한 후에도? 나는 믿음을 갖기로 했다. 노인이라면 반드시 다시 바다에 나갔을 거라는 믿음을.)